본문 바로가기

📖 마음의 문장들

『혼모노』 성해나 : '진짜'의 무게를 묻는 서늘하고 다정한 시선

『혼모노』 성해나

『혼모노』가 던지는 근원적 질문, 진짜에 대한 불편한 성찰

성해나 작가의 소설집 『혼모노』를 덮고 나서도 한동안 마음 한구석이 서늘했습니다. '진짜란 무엇일까?' 이 간단하지만 묵직한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쉬운 답을 주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고, 우리가 애써 외면했던 질문들 앞에 가만히 데려다 놓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 대한 제 감상을, 한 명의 독자로서 받은 솔직한 느낌으로 풀어보고자 합니다.

 

진짜를 잃어버린 사람들, 혹은 되찾은 사람들

가장 먼저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역시 표제작 「혼모노」였습니다. 혼모노(本物)는 진짜라는 뜻의 일본어지만, 온라인에서는 무언가에 과하게 몰입한 사람을 조롱하는 말로 쓰이기도 하죠. 작가는 이 단어의 씁쓸한 이중성을 소설 속으로 그대로 가져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30년간 신을 모셔온 베테랑 박수무당 ‘문수’입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진짜’였던 그에게 어느 날 갑자기 모시던 신이 떠나버립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신을 젊고 어린 여성 무당이 대신 모시게 되면서, 그는 하루아침에 ‘가짜’로 전락하고 맙니다. 신기를 잃은 그가 접신 연기를 위해 유튜브를 보고, 진짜 칼날 대신 모형 작두를 찾는 모습은 처절하면서도 어딘가 씁쓸한 웃음을 자아냅니다.  

 

이 소설의 백미는 마지막 굿판 장면입니다. 모든 것을 잃은 문수는 신의 보호 없이 맨몸으로 시퍼런 작두 위에 오릅니다. 피를 흘리는 고통 속에서 그는 더 이상 신의 대리인이 아닌, 한 명의 나약한 인간임을 온몸으로 증명하죠.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의 처절한 몸부림은 ‘진짜’ 무당의 신들린 춤보다 더 강렬한 울림을 줍니다. 그는 “이제야 진짜 가짜가 된 듯” 중얼거리며, 모든 것을 놓아버린 순간 비로소 완전한 자기 자신이 되는 해방을 맞이합니다. 저는 이 장면을 읽으며, 어쩌면 우리는 가장 완벽한 ‘가짜’가 되었을 때, 역설적으로 가장 ‘진짜’ 나 자신에 가까워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잠겼습니다.  

 

당신의 ‘덕질’은 안녕하신가요?

혹시 당신은, 문제가 있는 줄 알면서도 무언가를 열렬히 사랑해 본 적이 있나요?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는 바로 그 ‘죄책감을 동반한 쾌락(길티 플레저)’의 마음을 정면으로 파고듭니다. 소설 속 팬들은 아동 학대 논란에 휩싸인 영화감독을 여전히 지지하며 그들만의 성을 쌓습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주인공이 동물원에서 발톱과 이빨이 모두 뽑힌 호랑이를 만지는 장면입니다. 위험한 본성을 거세당한 채 상품처럼 전시된 호랑이를 만지며 느끼는 죄책감과 쾌감. 주인공은 그 감정이 자신이 감독을 사랑하며 느꼈던 감정과 똑같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가 사랑하는 아이돌, 열광하는 예술가가 어쩌면 실재하는 한 인간이 아니라, 위험한 부분은 모두 제거된 채 소비하기 좋게 만들어진 ‘이미지’는 아닐까 하는 서늘한 질문을 던집니다. 진짜 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보고 싶은 모습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의 ‘팬심’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균열을 비추는 거울

『혼모노』는 개인의 마음을 넘어 우리 사회의 맨얼굴을 비추는 거울 같기도 합니다. 재미교포의 눈으로 태극기 집회의 풍경을 낯설게 그려내거나(「스무드」) , 남영동 대공분실이라는 비극적 역사의 공간을 설계한 건축가의 내면을 파고드는(「구의 집」) 이야기들은 우리가 얼마나 다른 현실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특히 제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던 것은 여성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잉태기」에서 딸의 원정 출산을 두고 벌어지는 어머니와 시아버지의 갈등은 그저 막장 드라마가 아닙니다. 딸의 미래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정작 임신한 딸의 목소리는 사라져 버린 가족의 풍경은 숨이 막힐 듯 답답했습니다. 작가는 누가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대신, 그저 그 복잡하고 불편한 상황을 우리 눈앞에 펼쳐 보입니다.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다정한 거리두기

성해나 작가의 가장 큰 힘은 아마도 이 ‘거리두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인물들의 삶을 속속들이 파고들어, 마치 실존 인물인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실제로 책을 읽다 보면 인물 이름을 검색해보고 싶어질 정도입니다!) 하지만 결코 인물들을 단죄하거나 편들지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우리에게 보여줄 뿐이죠.  

 

작가는 “누군가를 함부로 이해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다정한 어른”이 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소설은 바로 그 태도를 닮았습니다. 성급하게 결론 내리는 대신, 독자 스스로 생각하고 질문할 공간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읽는 경험은, 정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끝없이 질문을 품게 되는 여정과 같습니다.

 

책을 덮으며: 당신의 ‘진짜’는 무엇인가요?

『혼모노』는 결코 편안한 책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고, 자꾸만 질문하게 합니다.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흐릿한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소설 속 인물들의 서늘한 눈빛과 나지막한 목소리는 책을 덮은 후에도 오랫동안 귓가에 맴돌 겁니다. 그리고 문득, 나 자신의 ‘진짜’는 무엇인지, 내가 믿고 있는 것들은 과연 진짜인지 되묻게 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문학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쉽게 요약할 수 없는 삶의 복잡함을 끈질기게 들여다보게 하는 힘 말입니다.